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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 유통 · 의료

강요된 고급화의 덫…'보급형 생리대'는 왜 사라졌나 [유통노믹스]

정부, ‘빅3’ 업체 정조준…유통 단계 ‘통행세’와 전면전
‘불안’ 파는 공포 마케팅…소비자 선택권 앗아간 상술
구조 개혁 없이 ‘반짝 인하’ 우려…독과점·면세 개편 시급

 

(조세금융신문=신경철 기자) “한국 생리대 가격이 해외보다 40%가량 비싸다. 필요하다면 정부가 위탁 생산해 무상 공급하는 방안까지 검토하라.”

 

지난 20일, 이재명 대통령의 작심 발언이 관가(官街)와 유통 업계를 강타했다. 단순한 물가 관리를 넘어 ‘공공재 위탁 생산’이라는 전례 없는 ‘극약 처방’이 거론되자 시장은 얼어붙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미 지난달 대통령 업무보고 직후 유한킴벌리, LG유니참, 깨끗한나라 등 이른바 ‘빅3’ 제조사를 정조준했고, 최근에는 국세청까지 가세하며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정부의 강경 기조는 단순한 ‘물가 잡기’ 차원을 넘어섰다는 분석이다. 2016년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신발 깔창을 사용해 사회적 공분을 샀던 ‘깔창 생리대’ 파동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시장 구조는 여전히 공급자 우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생리대 시장은 소비자가 ‘싸게 살 권리’ 자체를 박탈당한 기형적 구조로 굳어졌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 숫자 싸움의 함정…핵심은 ‘선택지의 실종’

 

대통령 발언의 도화선이 된 것은 여성환경연대가 2023년 내놓은 모니터링 지표다. 한국과 미국, 일본 등 11개국의 생리대 가격을 비교한 결과, 한국 제품(513개)이 해외 평균보다 약 39.55%(약 195원)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은 “한국 여성이 ‘봉’이냐”며 들끓었다.

 

업계는 “통계의 착시”라고 항변한다. 한국은 편의점·마트 등 오프라인 가격이 포함된 반면, 해외는 아마존 등 온라인 최저가가 기준이라 비교 자체가 불공정하다는 논리다. 실제 주력 품목이나 온라인 채널만 떼놓고 보면 가격 격차가 줄어든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수치 싸움보다 ‘보급형 라인의 부재’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지적한다. 미국 월마트나 영국 테스코 매대에는 개당 100원대 수준의 유통사 자체 브랜드(PB)나 중저가 제품이 즐비하다. 반면 한국 마트 진열대는 개당 300원을 호가하는 ‘유기농’, ‘프리미엄’ 제품이 점령했다. ‘얼마나 비싸냐’ 이전에 ‘싼 제품을 살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한국 시장은 철저히 공급자 위주로 재편돼 있다는 분석이다.

 

◆ 공포 마케팅이 부추긴 ‘강요된 고급화’

 

한국 시장에서 ‘가성비’가 설 자리를 잃은 분기점은 2017년이다. ‘릴리안 사태’로 촉발된 생리대 유해물질(VOCs) 논란은 소비자들에게 ‘케모포비아(화학물질 공포증)’를 심었다. 식약처가 뒤늦게 “인체에 유해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시장의 판도는 이미 뒤집힌 뒤였다.

 

기업들은 이 같은 불안 심리를 마케팅에 활용했다. “안전한 제품은 비싸다”는 인식을 심으며 기존 일반 펄프 제품을 단종시키거나 매대 구석으로 밀어냈다. 그 빈자리는 ‘유기농 순면’, ‘더마 테스트 완료’ 등을 앞세운 고가 라인업이 채웠다.

 

실제 조사 결과 ‘유기농’ 타이틀을 단 제품은 일반 제품보다 평균 26.56%(약 141원)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마케팅 비용과 브랜드 리뉴얼 비용이 고스란히 제품 가격에 전가된 것이다. 결국 소비자는 비싼 제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고급화’ 구조가 고착화됐다는 분석이다.

 

 

◆ 펄프값 내려도 가격은 요지부동…‘하방 경직성’ 뚜렷

 

소비자들의 불만은 “올릴 때는 신속하고, 내릴 때는 묵묵부답”인 가격 정책에 쏠린다. 통계청에 따르면 생리대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 6년간 18% 이상 급등해 전체 물가 상승률을 웃돌았다.

 

반면 핵심 원자재인 펄프 가격 흐름은 정반대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의 목재 펄프 생산자물가지수(PPI)는 2023년 초 고점을 찍은 뒤 하락세로 돌아섰다. 2025년 들어서도 안정화 추세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로켓과 깃털(Rockets and Feathers)’ 현상으로 설명한다. 원가 상승기에는 가격을 즉각 올리지만, 하락기에는 가격을 내리지 않는 하방 경직성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제조사들은 인건비·물류비 상승을 이유로 “인하 여력이 없다”고 버티지만, 원자재 급등기에 즉각 가격표를 바꿔 달았던 전례 탓에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 ‘오픈 프라이스’의 배신과 ‘통행세’

 

‘오픈 프라이스(Open Price·최종 판매자 가격 표시제)’의 실효성 논란도 재점화됐다. 오픈 프라이스란 제조업체가 아닌 유통업체(마트, 편의점 등)가 최종 판매 가격을 결정하는 제도다. 제품 포장지에 ‘권장소비자가격’을 적지 않고, 마트가 자율적으로 가격을 매겨 서로 경쟁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정부의 당초 취지였다. 하지만 기준점이 사라지자 소비자는 적정가를 가늠할 수 없게 됐고, 유통업체는 슬그머니 가격을 올리는 역효과가 났다.

 

생리대 시장은 이 제도의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례다. 권장가가 사라진 탓에 똑같은 제품이라도 유통 채널이나 ‘1+1’ 행사 여부에 따라 가격이 널뛰기를 반복한다. 가격 기준점이 모호해진 틈을 타 가격 결정권이 유통 단계로 넘어가면서, 당초 취지였던 가격 인하 효과는커녕 소비자의 가격 불신만 키우는 결과로 전락했다는 분석이다.

 

더 큰 문제는 제조와 유통 사이에 숨은 ‘통행세’ 구조다. 국세청에 따르면 일부 업체가 중간 단계에 계열사나 친인척 명의의 위장 법인을 끼워 넣어 수백억 원대 수수료를 챙긴 정황이 포착됐다. 물류비와 포장 용역비 명목으로 회사 자금을 빼돌리는 이러한 내부거래는 원가 상승의 주범으로 꼽힌다. 국세청이 최근 생리대 업계를 정조준한 것도 단순한 마진을 넘어선 ‘비자금성 통행세’ 관행을 뿌리 뽑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 대통령 호통에 ‘백기’…독과점·조세 구조 개편 시급

 

가격 결정권이 공급자에게 쏠린 근본 원인은 ‘경쟁의 실종’이다. 상위 3개사가 시장의 80%를 장악한 과점 체제에서 신규 진입은 요원하다. 까다로운 의약외품 허가 문턱과 대형 유통망을 쥔 기득권의 벽이 높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정부 차원의 제도적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행 ‘부가세 면세’ 제도가 제조사의 매입세액(원재료 구입 시 낸 세금) 환급을 막아 오히려 원가 부담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를 ‘영세율(0%)’ 제도로 전환해 제조 원가를 낮춰줘야 기업에도 실질적인 가격 인하 여력이 생긴다는 논리다.

 

대통령의 작심 발언 이후 업계는 백기(白旗)를 드는 모양새다. 주요 제조사들은 중저가 라인업 확대를 약속하며 몸을 낮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독과점 해소와 조세 제도 개편 등 구조적 수술 없이 기업 팔목만 비틀어서는 ‘반짝 효과’에 그칠 것이라 우려한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다양한 브랜드가 진입해 시장 판도를 흔들지 않는다면 소비자 선택권은 언제든 다시 좁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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