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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중계무역, FTA 시대를 건너는 다리 [1편]

-정보 노출의 위기 앞에서, 중계무역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조세금융신문=고태진 관세사·경영학 박사) 부산항 신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인 그곳에서 한 무역업체 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중계무역이 정말 어려워졌어요. FTA 때문에 원산지증명서에 모든 정보를 다 공개해야 하니까, 우리가 애써 연결해놓은 공급업체와 바이어가 우리를 빼고 직거래를 하려고 해요.”

 

이 말은 수천 년을 이어온 중계무역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이 21세기 FTA 시대에 와서 근본적인 도전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한 업체만의 고민이 아니라, 우리나라 무역 생태계 전체의 변곡점을 의미한다.

 

1. 천년을 관통한 중계무역의 긴 여정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시작된 이야기

중계무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기원후 2세기 실크로드의 번성기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사마르칸트나 부하라 같은 오아시스 도시들은 단순히 대상들이 물을 마시고 쉬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동양의 비단과 서양의 금은보화가 만나는 글로벌 거래소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중계상인들이 이미 그 시절부터 ‘정보의 비대칭성’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비단 생산업체는 로마의 구매자가 누구인지 몰랐고, 로마의 상인들도 중국의 실제 생산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중간에서 사마르칸트의 상인들이 이 정보를 통제하며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이것이 바로 중계무역의 본질이다.

 

한국의 중계무역 발전사, 생존을 위한 선택

우리나라 중계무역의 발전 과정을 보면, 그것은 단순한 사업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종합상사 제도를 도입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정학적 위치만큼은 탁월했다. 동북아시아의 중심에서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너머 미주까지 연결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2. 21세기에도 중계무역이 사라지지 않는 진짜 이유

 

무역 현장에서 본 중계무역의 핵심 가치

사람들은 중계무역의 현장을 마주할 때 종종 의문을 품는다. “왜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거래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단순한 질문 뒤에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현실이 숨겨져 있다.

 

첫째,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베트남의 한 중소 제조업체가 독일 바이어와 직거래를 시도한 사례가 있었다. 제품 품질은 충분했지만 계약서 해석, 품질 기준, 결제 조건, 분쟁 해결 방식 등에서 끊임없는 오해가 발생했다. 결국 6개월간의 협상 끝에 거래가 무산되었고, 이후 한국의 중계업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거래를 성사시켰다.

 

둘째, 신용과 신뢰의 문제다.

 

국제무역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상대방을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중소기업끼리의 거래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때 중계업체는 일종의 ‘신용 보증인’ 역할을 한다. 양쪽 모두에게 검증된 거래 파트너가 되어 위험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셋째, 물류와 금융의 복잡성이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물류 대란을 경험하면서 많은 기업들은 깨달았다. 단순히 가장 저렴한 운송업체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공급망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공급을 유지할 수 있는 탄탄한 물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각되었다. 중계업체들은 바로 이런 ‘비상시 대응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 시대의 필수 도구

최근 몇 년간 미-중 무역갈등을 지켜보면서 중계무역의 전략적 가치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2018년 이후 중국산 제품에 대한 미국의 고관세 조치가 본격화되면서, 많은 중국 기업들이 제3국 경유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통관 현장에서 관찰되는 사례들을 보면,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베트남이나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후, 다시 미국으로 수출되는 사례가 급증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정한 가공이나 부가가치 창출이 이루어져야 원산지 변경이 가능하지만, 중계무역이 지정학적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공급망 다변화의 핵심 전략

팬데믹 이후 ‘공급망 리질리언스(Supply Chain Resilience)’라는 개념이 화두가 되었다. 기업들은 이제 단순히 가격만 보고 공급업체를 선택하지 않는다. 리스크 분산, 대체 공급원 확보, 긴급상황 대응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이런 관점에서 중계무역은 공급망 다변화의 핵심 도구가 되었다. 하나의 중계업체가 여러 국가의 공급업체와 네트워크를 구축해두면,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겨도 즉시 대체 공급선을 가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FTA 시대의 딜레마, 투명성 vs 정보보호

 

원산지증명서의 정보공개 요구

FTA 특혜관세를 적용받으려면 원산지증명서에 최초 생산자부터 최종 수입자까지 모든 정보가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한-아세안 FTA나 한-EU FTA 등 많은 FTA에서 제3국 송장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EU FTA에서는 물품의 실제 생산자가 포장명세서 등 상업서류에 원산지신고서를 직접 작성해야 하므로, 생산자의 정보가 자연스럽게 공개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는 중계상이 수십 년간 지켜온 ‘공급자-구매자 정보 차단’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실제로 태국산 윤활유를 국내에서 소분‧포장 후 일본으로 재수출하는 사례에서, 연결원산지증명서1)(Back-to-Back C/O)를 발급받으려면 태국 생산업체와 일본 수입업체 정보가 모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결국 양쪽이 직접 연결되어 중계업체가 배제될 위험이 커진다.

 

1) 참조: [전문가 칼럼] 연결원산지증명서와 FTA 직접운송원칙(고태진, 월간조세금융, 2024.09)

 

제한적인 연결원산지증명서2) 제도

2) 참조: [전문가 칼럼] FTA 연결원산지증명서: 글로벌 무역의 핵심 도구(고태진, 월간조세금융, 2024.08)

 

현재 연결원산지증명서는 RCEP와 한-아세안 FTA에서만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타 주요 협정에서는 아직 도입되지 않아, 중계무역에서 FTA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경우가 매우 제한적이다.

 

역사가 증명하는 중계무역의 생명력

중계무역이 FTA 시대에 직면한 도전은 분명하다. 원산지증명서의 정보공개 요구는 중계상들이 수십 년간 지켜온 ‘정보 차단’ 원칙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한-아세안 FTA나 한-EU FTA 등에서 제3국 송장을 사용하더라도 최초 생산자와 최종 수입자의 정보가 모두 노출되어야 하는 현실은, 중계업체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사마르칸트의 상인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양을 연결했던 그 시절부터, 중계무역은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 속에서도 살아남아 왔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지중해를 장악했던 중세 시대, 대항해시대를 거쳐 근대 산업혁명까지, 그리고 우리나라가 종합상사 체제로 중동과 동남아를 잇던 1970년대부터 현재의 첨단 보세물류 시스템까지.

 

매번 새로운 기술과 제도, 그리고 국제정치의 변화가 중계무역을 위협했지만, 중계무역은 그때마다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FTA와 중계무역의 갈등 역시 이러한 진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신용과 신뢰의 문제, 복잡한 물류와 금융 네트워크, 그리고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 등 중계무역이 제공하는 핵심 가치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최근 몇 년간 미-중 무역갈등, 코로나19 팬데믹, 공급망 리질리언스에 대한 관심 증대 등은 오히려 중계무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이 갈등을 해결하느냐다.

 

단순히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거나, 반대로 FTA의 투명성 요구에 무조건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가치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창조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미 일부 기업들은 대행업체를 활용한 정보보호 전략을 시도하고 있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블록체인 기반의 선택적 정보공개 시스템, 연결원산지증명서 제도의 확대, 중계무역 전용 인증제도 등 다양한 혁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해결책들을 심도 있게 살펴보겠다. 한-인도 CEPA 사례를 통한 실무적 접근법부터 미래의 제도 혁신 로드맵까지, 중계무역이 FTA 시대에도 계속해서 번영할 수 있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결국 중계무역의 미래는 우리가 얼마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천년의 지혜와 21세기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중계무역 모델이 탄생할 것이다.

 

 

[프로필] 고태진 관세법인한림(인천) 대표관세사

• (현)경인여자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현)중소벤처기업부, 중기중앙회, 창진원, 경기TP, 인천TP 등 기관 전문위원

• (전)월드클래스 300, NCS워킹그룹 심의위원

• 고려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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